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사블랑카 회담 (문단 편집) === [[추축국]]의 [[무조건 항복]] 요구 === 이 회담에서 처음으로 '이 전쟁은 [[추축국]]의 무조건 항복(Unconditional Surrender)을 통해서만 종결시킨다.'는 방침이 등장하였다.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 자체는 [[남북전쟁]] 시기 북군의 사령관이던 [[율리시스 그랜트]]가 처음 사용했는데, 유럽 내에서는 싸우다가 적당히 ~~쇼부~~ 협상을 통해 강화하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이라는 말은 널리 퍼진 용어가 아니었다.[* 당장 20년 전의 [[제1차 세계 대전]]만 하더라도 국력이 한계에 몰린 [[독일 제국]]이 [[협상국]] 측에 강화를 '제의'하면서 종전이 이루어진 것이지 항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. 즉 조건부 항복이었던 셈이다. 해외 식민지를 모조리 빼앗기고 각종 무기개발 및 보유금지라는 사실상 고자가 되는 조건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독일 본토는 온존할 수 있었다. 그리고 [[베르사유 조약]]은 너무 굴욕적이기만 하고 각종 패널티를 안겨주기만 할뿐 독일이 가진 국력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. 이 덕분에 독일은 20년만에 다시 판을 키워 2차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. 프랑스의 육군원수 [[페르디낭 포슈]]가 베르사유 조약을 보고 '20년 짜리 휴전 조약'이라고 한탄한 것이 괜히 그랬던 것이 아니다.] 따라서 외교 실무 담당자들이 처음 무조건 항복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의 반응은 [[충격과 공포]] 그 자체. 외교관들은 '이러면 추축국 국민들의 단결은 엄청나게 강해질 텐데 괜히 [[긁어 부스럼]] 만드는 거 아님?'이라는 태도를 보였다. 또한 영국의 수상 [[윈스턴 처칠]] 역시 [[아돌프 히틀러]]만 제거된다면 독일 측과도 손을 잡고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[[무조건 항복]]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표했다. 하지만 1차대전의 어정쩡한 종전이 2차대전을 불러왔고, 어정쩡한 종전은 결국 또다른 전쟁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는 루스벨트의 입장은 단호했고[* 덧붙여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혼자 독일과 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내빼는 상황을 우려했는데 만약 무조건 항복이 연합국 모두의 강령으로 채택되면 이런 상황도 피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.], 결국 연합국은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종전의 조건으로 결정한다. ~~애초에 [[무기대여법|물주]]가 미국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뭘 어쩔 수가 없었다.~~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